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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노래 (일곱번쩨 부분)

혜자는 찻길에서 비낀 고궁의 돌담을 끼고 걸었다. 느릿느릿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뿐 꿈속의 길처럼 조용했다. 거짓말처럼 허기증이 말끔히 가신 위장에 술기운이 부드럽게 피어 올랐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마다 이끼낀 돌담의 안쪽, 오래 묵은 나무들이 머리 풀며 울었다. 혜자는 서너 걸음에 한 번씩 멈춰서서 찔끔찔끔 소주를 부어넣었다. 도수높은 안경을 썼을 때처럼 자꾸 발밑이 꺼져들었다. 약속위반이야. 혜자는 소리내어 말했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를 하던 동무들이 그녀만 남겨놓고 아무런 말없이 단순히 놀이에 싫증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돌아가버릴 때 혹은 숨바꼭질 놀이에서 술래가 된 그녀가 열심히열을셀동안그녀가절대로찾을수없는곳에숨어나오지않거나놀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린 아이들에게 막막하고 외로와진 그녀가 울 둣한 심정으로 외치던 소리였다.
그녀는 다시금 엄마를 이런 곳에 두다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다니 차라리 난 죽어버리고 싶어요, 라고 울면서도 나날이 새롭게 아름답게 피어나던 딸에게거짓말장이라고욕설을퍼부었다. 그래,빈집에그녀만남겨두고남편과 아이들은훌훌이떠났다. 마치어릴때의신의없는계집애들처럼.
돌담길은 어디까지 이어지는 것일까. 문득 어젯밤의 꿈이 생각났다. 꿈속에서 늘 가는 길인가. 어느 무너진 돌틈에 자신을 위한 표지가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안타까움뿐으로 꿈을 깨었었다는 기억이 그녀를 조바심나게 했다. 혜자는 병을 들어 꿀꺽꿀꺽 목 안으로 부어넣었다. 그것이 마치영원히깨지않을꿈의묘약인듯숨도쉬지않고단숨에마셨다. 모두들
나를 살인자라고 경계하고
기피하지만....그녀는 큰소리로 말하며 새삼스러운 호기로 빈병을 힘껏 내던졌다.....누구라도그런상황에서라면그럴수밖에없었을거야. 정말그랬다. 혜자는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 여느 때처럼 지하실에 꾸민 작업장에서 인형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고 더우기 아교를 녹이기 위해 전기곤로까지피운지하실은찜통같았다. 대문은안으로걸렸고찾아올사람도 없다는것이그녀로하여금속치마바람으로일하게했을것이다. 잠자는공주의 머리칼과 장신구를 붙이는 까다로운 공정(工程)을 끝내고 마무리 작업에 열중해 있을 때 지하실 문을 가로막고 기척없이 들어서는 낯선 사내를 보았다. 그때 그녀가 본 것은 사내의 얼굴이 아니라 자신의, 거의 벗은 몸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사내의 두 눈에 한껏 달구어진 전기 인두를 들이댄 것은 오직 공포심 때문이었다.
몸의곳곳에서꽃처럼피어나는취기에흔들리며혜자는걸었다. 무너진 돌틈에 숨은 언젠가 맺은 비밀의 약속, 사랑의 맹세를 찾듯 한 손으로 돌담을 쓸며 똑바로 앞을 보고 걸었다. 모두들 잊었다고, 어쩔 도리가 없지 않았느냐고 누군가 그녀의귓전에서웅웅속삭였다. 그녀가달아오른전기인두를들이대지않았다 하더라도 결과는 지금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돌담길, 꿈에는 그리도 익숙하게 자주 가는 길, 길이 끝나는 곳에는 꿈 깨인 쓸쓸한 현실이 있을 뿐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면서도 혜자는 꽃처럼 피어나는 취기가 영원히 그 길을 이어주리라는 기대로 더 깊은 어둠을 향해 한 걸음씩 옮겨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