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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노래 (네번쩨 부분)

오직창마다불을밝힌15층빌딩만이가득눈에들어왔다. 왜진작그생각을 못했을까. 정옥에게서K빌딩의위치를들었을때그맞은편에남편의근무지가 있다는 걸 전혀 생각지 못한 자신의 우둔함을 가볍게 나무라며 혜자는 빠져나온 지하도로 다시 바삐 내려갔다. 그는 아직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설혹 퇴근 시간이 지났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일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그는언제든어려운일이있으면의논해주기바란다고말하지않았던가. 인생의 어느 한 시절,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가장 가깝게 함께 지낸 사람으로서 이 추운 날따뜻한커피한잔나누는일에어떤끈끈함이나칙칙함이있는가. 그러한 관계에조차 인색하다면 사람들의 어울려 살아감,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우기 자신은 이제 새로운 출발, 멋진 일들에 대한 계획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곧 일을 시작할 것이라는, 게다가 인형극계의 독보적인 존재인 민선생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남편도 훨씬 미더워할 것이다.
쉴새없이 자문자답으로 의기양양해진 혜자가 [영우무역]이 들어 있는 5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을 때 수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빌딩의 5, 6, 7 층을 모두 [영우무역]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오셨읍니까, 아주머니. 혜자는 예상치 않은 벽에 잠깐 주춤했으나 곧 당당히 대답했다. 기획실장을 찾아왔는데요. 그가
인터폰을 들었다. 교환이 나오는 동안 수위는 다시 물었다. 누구시라고 그럴까요? 안사람이라고해주세요.젊은수위는고개를갸웃하고다시금찬찬히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으나 기획실이 나오자 곧 수화기를 건네 주었다. 기획실장입니다. 바로
곁에서 말하듯 송수화기를 가득 채우며 크게 울리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설었다. 당신..... 이세요? 나예요, 영선이 엄마예요.
귀에 설고 여유있는 그의 목소리가 와락 그녀를 위축시켜 혜자는 서툴게 더듬거렸다. 누구십니까, 제가 기획실장입니다만...... 그리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가 덧붙였다. 혹시 이영섭실장을 찾으시는 게 아닙니까? 그래요, 이영섭실장님을 대주세요. 제가 안사람이에요. 허덕이며 하는 그녀의 대답에 상대방은 아, 낮게 부르짖었다.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이군호입니다. 곧 나가지요. 곧이어 왼쪽으로
꺾인 복도로부터 키가 크고 아는 사내가 나타났다. 머리가 많이 벗어지고 안경을 쓰고 있었지만 혜자는 첫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남편의 입사동기로 꽤 가까운 사이었던 이군호였다. 만혼을 한 그는 결혼 전까지 술이 취하면 으레 그녀의 집에서 묻어자곤 했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접객용의 작은 방이었다. 무언가 얘기하고 있던 두 사람이 그들과 엇비껴 나간 뒤 실내는 시잇시잇 스팀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몇개의 의자와 탁자만이 놓인 장식없는 방을 혜자는 호기심도없이들러보았다. 그럴이유가짐작되지않는대로그가몹시당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터폰으로 차를 부탁하고 비로소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모두들 자신에게한결같이건강을묻는다. 마치당신의화약고는안전한가라고묻듯이. 혜자는말없이웃었다. 요즘은어떻게지내세요. 일을시작했지요.호오반가운 소식이군요. 무슨 일인지 물어도 괜찮습니까? 그럼요. 인형극에 관계하게 되었답니다.그리고집을옮길까해서요. 역시그이말대로환경을바꿔보는것은 좋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이는 자리에 없나요? 혜자는 웃음띤 얼굴로그를바라보며조심스레물었다. 모르셨읍니까? 그가미간을좁히며뜻 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반소매 스웨터를 입은 젊은 여자가 커피를 가져와 탁자 위에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