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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노래 (두번쩨 부분)

찬밥에 고추장을 비벼 늦은 점심을 먹고 잠깐 누웠던 혜자의 낮잠을 깨운 것은 요란한 벨소리였다. 누굴까. 얼결에 화들짝 놀라 깬 그녀가 마루문을 열었을 때 또 한차례 초인종이 울리고 등기 왔읍니다. 도장 주세요. 소리치는 집배원의 모습이 철대문 너머로 보였다. 도장이 어디 있더라. 도시 등기우편이 올 때가 없다는 생각과 집배원의 다그침에 허둥대며 예전의 버릇대로 대부분 빈 화장대 서랍들을 차례로 열었다. 역시 도장은 없었다. 도장이 없어요. 혜자는 밖을 향해 황망히 소리쳤다. 원참, 손도장이라도 찍으쇼.
등기편지는 건넌방 처녀에게 온 것이었다. 건넌방은 아무런 기척없이 조용하고 부엌문에는 맹꽁이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혜자는 부엌창으로 손을 들이밀어
편지를넣어두고는방으로들어왔다. 놀라잠에서깬탓에아직쿵쿵뛰는가슴을 누르며한껏열린화장대서랍들을밀어닫았다. 맨아래칸네번째서랍을 닫으려다 혜자의 손이 멈칫 멎었다.
그곳에들어있는눈에익은작은수첩때문이었다. 까마득히잊고있었던 것, 그러나 분명히 손때묻은 자신의 것이었다. 그녀는 수첩을 꺼내 성급히 한 장씩넘겼다. [29일덕수궁][冬服세탁소][16일오후3시아라야][신세계백화점 바겐세일, 15일부터 21일 까지, 모직 샤쓰와 조끼] 짤막짤막한 메모들은 흐릿하게 기억나는 것도 있고,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도 많았다. [3일 우미화원 꽃바구니, 카네이션 빛깔 섞어 60송이] 이것은 아마 스승의 환갑잔치에 가져갈 선물이었을것이다. 때로미소지으며때로애써기억을더듬어눈살을찌푸리며 혜자는 하나씩 읽어나갔다. 수첩의 뒷부분에는 전화번호들이 적혀 있었다. 위로부터 나란히 적힌 것은 그녀의 대학동창들의 전화번호였다. 그네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던 친목계 회원이기도 했다. 비교적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었는데 왜 그네들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을까. 혜자는 비로소 할일을 찾아낸 듯 성급히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숙자가 근무하는 여성지 편집실로 전화를 했을 때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그녀가 오래전에 잡지사를 그만두었음을 알려주었다. 애경의 집으로 전화를 걸자, 막바로 테입에 녹음된 여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잘못된 번호이오니 다시 거시기 바랍니다. 아라비아 숫자를 하나씩 짚어 확인하며 다시 돌렸으나 마찬가지였다. 이상한일이었다. 무엇엔가흘린기분이었다. 명화의집은아예 신호음만 갈 뿐 받지를 않았다. 그녀는 참을성을 가지고 춘자의 집 번호를 돌렸다.
전화번호가 바뀌었읍니다. 상대방은 짧은 한마디로 전화를 끊었다. 혜자는 수화기를내려놓고잠시망연해졌다. 자신이홀로떨어져있던이태간의세월이 비로소 엄청난 현실감으로 압박해 왔던 것이다. 그것은 쓰디쓴 배신감이기도 했다.
이게 마지막이야. 그녀는 속으로 다짐하며 마치 자신의 운(運)을 걸고 마지막 패를 던지는 도박꾼처럼 비장한 심사가 되어 다섯 번째로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떨어지고 여보세요, 응답하는 목소리에서 곧장 정옥의 얼굴을 떠올리며 혜자는 짐짓 느릿느릿 말했다. 정옥이? 나 혜자야. 어머, 어머. 뜻이 분명치않은감탄사의되풀이에이어말이끊겼다. 죽은사람에게서온전화라도 받은 듯 질린 기색이 역력히 전해졌다. 오랜만이구나, 정말 그래. 건강은 어떠니? 그녀의 말을 받으며 정옥이 허둥지둥 덧붙였다. 어디 있니? 집이야, 집에 왔어. 다른친구들잘있지. 통연락이안되는구나. 그럴거야. 이사를많이했어.
만나고싶다는혜자의말에정옥은잠시뜸을들인후대답했다. 마침잘 됐어. 봉선이가 남편 따라 외국으로 가게 되어 송별회를 해주기로 했어. 7시야, 광교 K빌딩 13층 스카이라운지 알지? 거기야. 모두들 널 보면 반가와할 거야.
정옥과 통화를 끝낸 후 혜자는 다시 인형극연구소로 전화를 걸었다. 민선생은인형제작도하지만인형극연출에더뜻이큰사람이었다. 혜자가만든 <빨간 모자>와 <해님 달님>의 인형으로 텔리비전 방송국에서 극을 연출한 적도 있었다. 그때 민선생은 혜자가 만든 인형들이 표정이 살아 있고 아이디어가 참신하다고 칭찬했다. 언젠가 인형전시회를 해도 좋지 않느냐고 부추긴 것도 그였다. 2년간은 그녀에게만 긴 시간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김혜자]라는 이쪽의 밝힘을 듣고도 그는 금시 알아듣지 못했다. <빨간 모자>와 <해님 달님> 극에 쓰인 인형을 만들었던 김혜자라고 설명을 했을 때야 그는 아, 가늘게 놀람의 외침을 내뱉았다. 그러나 그는 곧 예사롭게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그도 잘 알 것이다. 혜자가 어떻게 지냈는가. 아는 사람 사이에서는 일혼 번도 더 돌아다녀 낡아빠지고 진부한 얘깃거리가 되었을 테니.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아주 좋은 편이에요. 요즘도 인형극 하시지요. 그녀는 오래 얘기하고 싶었다. 그는 친절하고 더우기 혜자의 인형에 대해 호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언제 짬내서 한 번 놀러나오십시오. 지금이라도 나갈 수 있노라고 저녁의약속시간까지 서너 시간쯤 낼 수 있노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혜자는 아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그는 워낙 바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서운한 마음을 달랬다. 그는 인형극에 미쳐 마혼이 넘은 이제까지 독신으로 지내며 인형극에 관한책을쓰고
소극장과 국민학교 강당, 그리고 텔리비전 방송국으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렇더라도그가혜자의인형에보인관심은잊지않았을것이다. 인형전시회를 하고 전시회장에서 직접 인형극을 보여주자는 제안도 잊지 않았을 것이다. 내일이라도민선생을만나야겠다고혜자는생각했다. 다시인형만드는일을할 수있으리라. 낙도와벽지의학교로순회공연을다니고또인형극의인형들을한 세트씩 갖춰 싼값에 보급한다면 어린이들은 스스로 집안에 작은 극장을 갖춰 인형극놀이를할수있으리라. 그것이야말로자신이뜻을갖고하고싶은일이며 또한 얼마간 돈도 벌 수 있을 깃이다. 그것은 당연하고도 근사한 일이었다.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존(自存), 독립이 될 것이다. 다시금 인형제작을 시작하겠다는 결의가 그녀에게 갑작스런 생기와 활력을 주었고, 그것은 또한 이제껏의 생할이 단순히 기생적(寄生的)인 삶으로 굴욕적인 것이었다고 자신을 준열하게 비판하게끔 만들었다.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앞으로의 창창한 계획에 대해 얘기하리라. 인형과 인형극에 대해 자기만큼 알고 있는 사람이 그들 중 누가 있겠는가. 민선생과함께할전시회나순회공연얘기는거짓말이아니다. 약속된 것은 아니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민선생은 늘 혜자가 만드는 인형에관심을표하지않았던가. 친구들사이에서자신의얘기가일혼번씩이나 돌고돌았을것이란생각은자신의기우일뿐일지도몰랐다. 처음전화받았을때 민선생이 곧 그녀를 기억해내지 못하던 것 그리고 뒤를 이은 감전된 듯한 놀라움과 막연한 약속의 말에서 그녀를 기피하는 심사를 읽은 것은 이편의 공연한피해의식인지도몰랐다.

Recordings

Comments

anno
April 16, 2013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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